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역사책에서 배운 35년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긴 시간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교과서 속 한 줄로만 기억했던 일제강점기가 518년이나 이어진 조선왕조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습니다. 고작 40년도 안 되는 침략의 역사가 어떻게 반세기에 가까운 왕조를 지워버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그 암울한 시간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습니다.
국권 침탈의 시작, 을사늑약부터 경술국치까지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조선의 운명을 바꾼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습니다. 여기서 을사늑약이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으로, 정식 명칭은 '을사조약'이지만 강제로 맺어진 불법 조약이라는 의미에서 '늑약(勒約)'이라 부릅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총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들을 이끌고 고종을 협박했고, "거부한다면 뒷일은 우리도 책임지지 못합니다"라는 노골적인 위협을 남겼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제가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느낀 건, 외교권 상실이 단순히 국제 업무를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외교권을 빼앗긴다는 것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속국이 되어 모든 인권과 국권 침해를 국제사회에 호소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실상 나라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죠.
을사늑약 체결 2년 뒤인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 그리고 1910년 경술년, 친일파 이완용의 주도 하에 한일 병합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여기서 병합조약이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완전히 흡수 통합되는 조약을 뜻하는데, 이는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강제 병합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며 518년 조선왕조의 역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저는 이 역사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우리 민족의 무능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제국주의 시대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두 가지가 모두 작용했지만, 결국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에 외교와 군사력의 균형을 맞추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항의 불씨, 안중근 의사와 3.1 운동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역사적 의거가 일어났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했습니다. 러일 전쟁 승리 후 만주에서 러시아 대표와 회담을 갖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 이토는 안중근 의사의 정확한 저격으로 피격 30분 만에 사망했습니다(출처: 독립기념관).
안중근 의사가 체포된 후 진행된 재판은 명백한 불법이었습니다. 러시아의 행정권이 미치는 하얼빈에서 일어난 사건임에도 재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고, 뤼순 감옥에서 일본 측의 입맛대로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재판권이란 특정 사건에 대해 법적 판단을 내릴 권한을 의미하는데, 국제법상 범죄 발생지 국가가 재판권을 가져야 함에도 일본이 강제로 가져간 것입니다.
직접 자료를 찾아보니 안중근 의사는 재판에서 "이는 독립전쟁 중에 벌어진 사건이며, 저는 국제법에 따라 포로로 취급받아야 합니다"라고 당당히 주장했습니다. 불과 일주일 만인 2월 14일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1910년 3월 26일 31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죽기 전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려 했지만, 일제는 그 시간조차 주지 않았고 시신마저 뤼순 공동묘지 어딘가에 묻어버려 지금까지도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사망 소식과 함께 항일 감정이 폭발하며 전국적인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고,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 열사는 담을 넘어 시위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3월 10일 전국에 휴교령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휴교령이란 모든 학교의 정상적인 수업을 중단시키는 행정 명령으로,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모이는 것을 원천 차단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고향 천안으로 돌아온 유관순 열사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천여 명과 함께 만세를 외쳤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건, 17살 어린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중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이었습니다. 19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는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장기 손상과 방광 파열로 사망했습니다. 출소를 불과 4개월 앞둔 시점이었죠.
실제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했을 때, 좁고 어두운 독방을 보며 당시 독립투사들이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죽기 전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한 문장이 얼마나 무거운 의미인지 이제야 이해하게 됩니다.
도둑같이 찾아온 광복, 그러나 끝나지 않은 과제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항복하면서 우리는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경성 거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습니다. 일왕의 방송이 매우 어려운 어휘로 되어 있어 조선인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여전히 남아있는 일본군과 경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가 함석헌 선생은 이날을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정치범 석방, 식량 보장, 치안 유지 불간섭 등 다섯 가지 조건을 약속받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8월 16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석방되었고, 그들은 광화문에서 종로, 남대문으로 행진하며 억눌렸던 "대한 독립 만세!"를 마음껏 외쳤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이것이 진정한 자주적 독립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결국 나라는 분단되었고,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을 맞이했지만 이후 한반도는 분단국가가 되면서 우리의 역사는 또 다르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처럼 왕이나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아닌, 시민과 시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나라를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 대의민주주의란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선출된 대표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길고 긴 역사 속에 비극적인 순간도 있었고 암울하고 절망적이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하여 우리는 교훈을 얻습니다. 역사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고 되풀이되며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결국 희망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려도 싸워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 외에도 작게나마 싸워 다른 사람에게 독립투쟁심을 일깨워준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은 독립투사들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들은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좋은 밑거름이자 바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군사정치와 독재정치로 인해 빼앗긴 민주주의 정신을 다시 되찾아온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