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처음에 이순신 장군의 전투 기록을 접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전투를 기록할 수 있었을까?" 현대전도 실시간으로 정확히 기록하기 어려운데, 기록 장비 하나 없던 시대에 적선의 수, 전사자 수, 심지어 전술까지 일일이 장계로 올려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 사료를 찾아보면서 깨달은 건,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단순히 전투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철저한 기록 정신과 전략적 사고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한산도대첩에서 드러난 전술적 우위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한 일본은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이는 통일전쟁(統一戰爭)으로 실직한 사무라이들의 재배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통일전쟁이란 일본 전국시대를 끝낸 내전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직업 군인이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게 된 상황을 말합니다.
조선은 200년간의 평화로 군사력이 약화된 상태였고, 일본군은 부산 상륙 후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시켰습니다.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고, 육지에서는 장수들이 성을 버리며 전쟁은 이미 끝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달랐습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개전 소식에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고, 선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출전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격분한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의 최고 전문가인 구키 요시타카를 파견해 140척의 함대로 이순신을 섬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공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에 구키 함대와의 합류를 기다리지 않고 70여 척만 이끌고 단독 출전했습니다.
1592년 7월 8일, 이순신은 견내량의 좁은 수로를 피하기 위해 판옥선(板屋船) 5척으로 와키자카 함대를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습니다. 판옥선이란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으로, 2~3층 구조에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각종 화포를 탑재한 중무장 군함을 뜻합니다(출처: 국립해양박물관).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함대는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일본 함대를 포위했습니다. 학익진은 학의 날개처럼 좌우로 길게 펼쳐 적을 포위하여 집중 포격하는 진형으로, 쉽게 말해 양쪽에서 에워싸며 동시에 화포를 퍼붓는 전술입니다. 일본 함대가 돌진하여 진을 깨려 했으나, 조선 함대의 일제 화포 공격으로 선봉 세키부네(關船) 두세 척이 순식간에 파괴되었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부분은 이순신이 와키자카의 대장선을 집중 공격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일본군이 대장이 죽으면 쉽게 와해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와키자카가 대장선을 버리고 작은 배로 도망치자 일본 함대는 전투를 포기했습니다.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아 조선은 59척의 적선을 격파하고 수천 명을 전사시켰으며, 조선 수군은 단 한 척도 피해 없이 3명 전사, 몇 명 부상에 그쳤습니다.
한산도대첩 직후 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일본 함대 40여 척을 발견했습니다. 안골포는 수심이 얕고 갯벌이 드러나는 좁은 지형이라 이순신은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하려 했으나, 한산도의 패배를 경험한 일본군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장사진(長蛇陣)을 펼쳐 판옥선 두 척씩 번갈아 들어가 화포 공격을 퍼붓는 전법을 사용했습니다. 장사진이란 함대를 뱀처럼 길게 늘어뜨려 좁은 수로에서도 효과적으로 화력을 투사하는 진형을 말합니다.
이순신의 3차 출전 전과는 놀라웠습니다:
- 총 80척의 적선 격파
- 수천 명의 일본군 전사
- 조선 수군 손실: 단 한 척도 없음
- 조선 수군 인명 피해: 19명 전사, 116명 부상
이 전과로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되었고, 전라도가 온전히 보존되면서 히데요시조차 해전 금지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명량해전과 13척의 기적
제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의문이었던 부분은 이겁니다. 선조가 이순신에게 누명을 씌우고 옥에 가뒀는데, 왜 이순신은 난을 일으키지 않았을까요? 당시 이순신을 따르는 병사들은 어마어마했고, 마음먹고 난을 일으켰다면 왕이라도 못 막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히데요시의 해전 금지령으로 이순신이 별다른 전공을 올리지 못하자, 선조는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니시가 보낸 가짜 첩보를 믿고 부산 앞바다 출전을 명령했으나, 이순신은 전술적 불리함을 이유로 거부했습니다. 선조는 이를 빌미로 이순신을 체포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처벌을 내렸습니다. 백의종군이란 무관이 관직을 박탈당하고 흰옷을 입은 일반 병사 신분으로 강등되어 전쟁터에서 복무하는 것을 뜻합니다.
백의종군 중 어머니의 부고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아들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오던 중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이 또 있으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라고 기록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대목에서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와 동시에 그의 그릇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의 후임 원균은 그를 시기하여 겁쟁이라고 험담하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막상 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이 왜 싸움을 피했는지 알게 됩니다. 원균은 판옥선 160척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칠천량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했고, 조선 수군이 궤멸되자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습니다.
이순신은 흩어진 군사를 모으고 군수 물자를 확보하며 수군 재건에 힘썼습니다. 조정에서는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신이 죽지 않는 한 적들은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라며 거절했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이 도망치며 숨긴 판옥선 12척을 찾아 인계받았고, 전라 우수사가 한 척을 이끌고 합류하여 총 13척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1597년 9월 16일, 일본 함대 300여 척이 명량 해협으로 진입했습니다. 전투를 앞두고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필히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라 하였다"라며 사기를 진작시켰습니다. 그는 울돌목의 좁고 물살이 센 지형을 활용할 계획이었습니다.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세키부네 133척만 이끌고 명량으로 들어왔고, 이순신은 대장선을 이끌고 홀로 진입했습니다. 다른 12척의 판옥선은 적의 대함대에 주눅 들어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명량 한가운데에서 판옥선 한 척과 왜군 133척이 충돌했습니다. 좁은 해협의 특성상 이순신 함선 한 척이 길목을 막자 적선들이 돌파하지 못했고, 이순신은 30분 동안 홀로 시간을 벌었습니다.
조류가 조선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자 전세가 역전되었고, 조선 함대는 적선 31척을 부수고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죽였습니다. 13척 대 133척이라는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한 대승이었습니다. 명량 해전 후 이순신은 약 150km를 퇴각했는데, 이는 조선 수군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사기를 살리는 일차적인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시간을 벌면서 수군 병력을 충원하고 군수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인 후퇴였습니다.
명량 해전 승리 직후, 이순신은 막내아들 이면이 전사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슬피 통곡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고금도에 임시 통제영을 설치하여 수군 재건에 힘썼습니다.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최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명나라도 더 이상의 전투를 원치 않아 일본군에게 뇌물을 받고 철수를 허용하려 했고, 조선은 지휘권을 명군에게 넘겨준 상태라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철수를 지켜봐야 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순천 왜성에 주둔 중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며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진린은 유정과의 불화로 포위를 풀지 않았습니다. 고니시는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를 통해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습니다.
이순신은 고니시가 구원 요청을 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포위를 풀고 시마즈 지원군을 공격하기로 작전을 변경했습니다. 진린 역시 이순신 혼자 싸우게 내버려 두었다가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함께 시마즈 지원군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병사 2만, 함선 500척의 일본 대군과 조명 연합군이 노량 앞바다에서 격돌했습니다. 시마즈는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명군이 있는 위쪽 길로 돌진했지만 길이 뚫리지 않았고, 명나라 장수 진린의 판옥선이 위기에 처하자 이순신이 조선군을 보내 진린을 구했습니다.
길을 뚫는 데 실패한 일본군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해도를 돌아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그곳에는 조선군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밤의 어둠과 연합군의 포격 속에서 일본군은 길을 잘못 들어 관음포로 들어가 포위당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마지막 발악을 했고 난전이 벌어졌습니다. 명나라 장수 등자룡이 돌격 중 명군의 오발 포탄에 맞아 전사하고 일본군에게 백병전으로 공격당했습니다. 이순신이 등자룡을 구하러 나섰으나, 이때 일본군의 총알이 이순신의 가슴을 관통했습니다.
이순신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전투가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며 조선군의 사기를 지키려 했습니다. 제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대목입니다. 이순신이 전사한 뒤에도 연합군은 끊임없는 총공세를 퍼부어 노량 해전을 대승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연합군은 일본 선박 200척을 격멸하고 100척을 사로잡았으며, 수천 명의 일본군을 사상시켰습니다. 연합군도 800여 명의 병사, 명나라 장수 등자룡, 조선 장수 8명이 전사하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군이 차례로 퇴각하면서 7년간의 동아시아 전쟁이 끝났습니다.
선조는 전쟁 공신을 호성공신(扈聖功臣), 선무공신(宣武功臣), 정난공신(靖難功臣) 세 종류로 분류하여 책봉했습니다. 호성공신은 왕을 호위한 신하, 선무공신은 전투에 나가 공을 세운 장수, 정난공신은 반란을 진압한 이들을 뜻합니다. 선조는 자신을 따라 의주까지 간 신하들과 명나라에 도움을 청한 이들을 높이 평가하여 호성공신을 많이 책봉했습니다.
특히 선조는 원균을 이순신과 같은 1등 공신에 올리며 이순신을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이순신의 전공을 확실히 기록하고 원균의 무능과 악행을 기록하여 둘이 같은 급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인조 21년, 이순신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지면서 그는 충무공 이순신으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조선 역사에서 선조만큼 무능한 임금이 그 시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지독한 악몽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나라 한반도는 이순신 장군님 덕분에 지킬 수 있었고, 전라도에 거주하였던 당시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한반도를 구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순신 장군께서 당시 백성들을 위해 썩어빠진 왕조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하셨다면 더욱 역사의 빛이 되셨을 텐데 그러지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선택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Tao9iwejRo&list=PLag20yJERjFqstrKdVYnpxnzSga8m2vtz&index=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