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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실학자 (거중기, 수원화성, 마과회통)

by kiri17 2026. 3. 17.

 

정약용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건축·의학·농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수원 화성 건설이라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불과 2년 9개월 만에 완성해 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저는 처음 이 기록을 접했을 때 현대 공법으로도 쉽지 않을 공사를 그 시대에 어떻게 이뤄냈는지 정말 놀라웠습니다.

천주교 박해 속에서도 지켜낸 개혁 파트너십

정조 시대, 천주교는 조선에서 가장 위험한 종교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1791년 진산 사건에서 정약용의 외사촌 형 윤지충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이유로 참수당했는데, 이는 천주교에서 조상 제사를 우상 숭배(偶像崇拜)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상 숭배란 신 이외의 대상을 신처럼 섬기는 행위를 뜻하는 종교 용어입니다.

정약용도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으며 끊임없이 공격받았지만, 정조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정조가 얼마나 확고한 개혁 의지를 가졌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조정의 반대파들은 호시탐탐 정약용을 제거하려 했지만,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를 지켜냈습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1799년에는 형 정약전마저 천주교에 연루되면서 정약용이 사직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느라 애쓰는 임금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죄송했던 거죠. 하지만 정조는 끝까지 그를 곁에 두었고, 이러한 신뢰 관계가 조선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건축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수원 화성 건설, 과학과 기술의 총집합

1792년 정약용은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가 급히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바로 수원 화성 건설이라는 국가 프로젝트 때문이었죠.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지키고 상업·농업을 갖춘 신도시를 만들어 개혁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정약용은 상중임에도 프로젝트에 합류해 '성설(城說)'이라는 설계 매뉴얼을 완성했습니다. 여기서 성설이란 성곽 건축의 원리와 공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술 문서를 의미합니다. 이 문서에는 성벽을 쌓는 방법, 기초를 다지는 기법, 돌의 크기를 표준화하는 모듈화(Modularization) 공법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모듈화란 부품의 규격을 통일해 작업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식인데, 18세기 조선에서 이런 개념을 적용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정약용이 설계한 옹성(甕城)도 주목할 만합니다. 옹성은 성문 앞에 추가로 설치하는 이중 방어 구조물로, 적이 성문을 직접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실제로 수원 화성을 방문했을 때 이 옹성 구조를 보면서, 당시 조선의 방어 기술이 상당히 과학적이었다는 걸 체감했습니다.

하지만 정약용의 진가는 기계 발명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는 명나라 기술서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해 거중기(擧重機)를 고안했습니다. 거중기란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장치로, 도르래와 지렛대 원리를 응용한 기중기(起重機)의 일종입니다. 서양식 기어 제작이 불가능하자 정약용은 끈 10개로 작동하는 수동 거중기를 만들어 10톤이 넘는 돌을 들어 올렸습니다.

여기에 더해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공사 도구들을 추가로 개발했습니다.

  • 유형거(遊衡車): 지렛대 원리를 이용한 돌 운반 수레로, 적은 힘으로 무거운 돌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 녹로(轆轤): 현대의 크레인과 유사한 구조로 높은 곳에 자재를 올리는 장치였습니다
  • 활차(滑車): 도르래를 여러 개 조합해 힘을 분산시키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러한 기계들 덕분에 백성들의 노동 강도가 대폭 줄어들었고, 수원 화성은 단 2년 9개월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기술 수준으로는 최소 5년 이상 걸릴 공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약용의 과학적 역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출처: 수원문화재단).

백성을 살린 의학서, 마과회통

정약용의 업적은 건축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1797년 곡산부사로 재직하던 시절, 천연두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천연두는 당시 '마마'라고 불리던 전염병으로, 치사율이 30%에 달하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여기서 치사율(致死率)이란 감염자 중 사망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역학 지표입니다.

정약용은 조선과 중국의 의학서를 연구해 조선 백성에게 맞는 치료법을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마과회통(痲科會通)'입니다. 이 책에는 천연두 예방법부터 증상별 치료법까지 체계적으로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정약용이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백성의 생명을 실질적으로 구하려 했던 실천가였다는 걸 느꼈습니다.

정조는 정약용의 이런 능력을 높이 평가해 1799년 그를 형조 참의로 임명했습니다. 형조 참의란 오늘날의 법무부 차관급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전국의 형사 사건을 총괄하는 자리였습니다. 정약용은 이 직책을 맡아 전국의 형사 사건을 재조사하며 억울하게 누명을 쓴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떠올리게 하는 천재

정약용을 보면 자연스럽게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떠오릅니다. 다빈치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이자 과학자, 해부학자이자 지질학자였습니다. 여기에 천문학자·식물학자·지리학자·작가·요리사까지, 한 사람이 13가지 직업을 동시에 가졌던 인물입니다. 정약용 역시 유학자이자 실학자, 건축가이자 의학자, 발명가이자 형조 관리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정약용은 조선의 다빈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당대의 지식을 통합하고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죠. 다빈치가 해부학 지식을 회화에 접목했듯, 정약용은 서양 기계학을 조선 건축에 접목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건 정약용이 유배 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배웠다는 점입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직접 농사를 지었습니다. 양반이 백성에게 머리 숙여 배운다는 건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죠. 이런 겸손함과 실천력이 있었기에 정약용은 50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는 학문의 원천이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스스로 발견하거나 청나라 서적을 통해 배우는 것이 전부였죠.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정약용은 혼자 힘으로 건축학·의학·농학·법학을 섭렵했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정약용의 진정한 위대함을 봅니다. 단순히 지식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을 백성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이 그를 역사에 남을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정약용은 정조의 애정을 받은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거장이었습니다. 수원 화성이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남겼고(출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마과회통으로 수많은 생명을 구했으며, 18년 유배 생활 동안에도 학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만약 오늘날 정약용 같은 인물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분야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으신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기후 위기나 사회 문제를 과학기술로 해결하는 현대의 정약용들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xeUzIB3Gm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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