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은 조선시대 왕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십니까? 아마 대부분 세종대왕을 떠올리실 겁니다. 지금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한글, 바로 그분이 백성을 위해 직접 만든 독자적 문자체계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제자와 창제 원리가 명확한 문자인 한글은 2024년 기준 전 세계 78개국에서 한국어 교육과정이 운영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출처: 교육부). 제가 최근 광화문을 지나며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는 이 소중한 언어를 제대로 가꾸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창제 정신
한자만 사용하던 15세기 조선, 일반 백성들은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세종대왕의 위대함이 드러나는데요,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하면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되는 서문에 그 뜻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글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도 쉽게 배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문자 체계입니다.
한글의 제자원리(制字原理)를 살펴보면 그 독창성에 감탄하게 됩니다. 제자원리란 글자를 만드는 기본 원리를 의미하는데, 한글은 자음의 경우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고, 모음은 천·지·인 삼재(三才) 사상을 바탕으로 설계되었습니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죠. 제가 외국인 친구에게 이 원리를 설명해 줬을 때,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이라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음소문자(phonemic writing system)로서 한글의 장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음소문자란 소리의 최소 단위인 음소를 글자로 표현하는 문자 체계를 말하는데, 자음 14개와 모음 10개를 조합하여 이론상 11,172개의 글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영어 알파벳도 음소문자이지만,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음절 단위로 모아쓰기 때문에 시각적 인식 속도가 빠르고 정보 밀도가 높습니다(출처: 국립국어원).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화문 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동상은 높이 6.2m에 달합니다. 동상 아래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측우기가 함께 전시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뿐 아니라 과학기술 발전에도 힘썼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죠. 제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감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는데, 그럴 때마다 한국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낍니다.
순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한글 보존의 필요성
'시나브로'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천천히 진행되는 상황을 표현하는 순우리말입니다. 한자어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 한국어를 순우리말이라고 하는데, '나비', '바람', '하늘'처럼 일상적인 단어부터 '오손도손', '알음알음' 같은 의태어까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문제는 현대 한국어 환경에서 이런 순우리말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발표된 국립국어원 조사에 따르면, 일상 대화에서 외래어 사용 비율이 2020년 대비 2024년 약 18% 증가했다고 합니다. 특히 10~20대의 경우 그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제가 평소 메신저로 친구들과 대화할 때를 돌이켜봐도, '레전드', '핵인싸', '킹받네' 같은 외래어나 신조어를 습관적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음악 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차트 상위권 곡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눈에 띕니다:
- 후렴구가 영어로만 구성된 곡의 비중이 전체의 60% 이상
- 제목 자체를 영어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
- '촌스럽다'는 인식 때문에 순우리말 가사를 의도적으로 회피
이런 현상을 두고 일부에서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전략'이라고 말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K-팝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건 한국만의 독특한 정체성 때문이었지, 영어를 많이 섞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글날은 1926년 음력 9월 29일 '가갸날'로 처음 제정된 후, 1928년 '한글날'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2013년부터 국가 공휴일로 재지정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쉬는 날이 아니라 우리 문자의 가치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글은 탄압받았고, 독립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한글을 지켰습니다. 주시경, 최현배 같은 한글학자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스마트폰 사용이 늘면서 맞춤법을 자주 틀립니다. '되'와 '돼', '-(으)ㄹ게'와 '-(으)ㄹ께'를 헷갈리고, 띄어쓰기도 귀찮아서 대충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네팔에서 온 한 소년이 세종대왕과의 '특별한 연결고리'를 느끼며 한글을 열심히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접하니, 정작 모국어 화자인 제가 한글을 소홀히 대하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한글을 자연스럽게 익혔기에 그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한국 대학에서 한국어학을 전공할 정도로 한글은 학문적 가치가 높은 문자 체계입니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새로운 음절을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고, 표음문자이면서도 모아쓰기 방식으로 가독성을 높인 설계는 언어학적으로도 매우 독특합니다.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겁니다. 메신저에서 맞춤법을 지키려 노력하고, 외래어 대신 순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건 바꿔보려고 합니다. '대박'보다는 '엄청나다', '리얼'보다는 '정말'이라고 쓰는 것처럼요. 한글날에는 단순히 쉬는 날로만 여기지 않고,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한글의 과학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외국인이 우리 문자에 애정을 느끼는데, 정작 우리가 무관심하다면 그보다 아이러니한 일이 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