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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과 고종 (세도정치, 권력투쟁, 쇄국정책)

by kiri17 2026. 3. 16.

 

솔직히 저는 운현궁을 처음 방문했을 때까지만 해도 흥선대원군을 단순히 '쇄국정책을 고집한 보수 인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운현궁의 작은 전각들과 궁궐을 잇는 전용 문 터를 보면서, 이곳에서 펼쳐졌던 조선 말기 권력 투쟁의 민낯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될 수 없었던 남자가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그 아들과 평생 앙숙으로 살다 간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책 속 기록이 아니라 한 가문의 비극이자 나라 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세도정치 종식과 대원군의 개혁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 조선은 어떤 상태였을까요?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로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안동 김 씨를 비롯한 외척 가문들이 조정을 좌지우지하며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여기서 세도정치란 특정 가문이 왕실의 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를 의미합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제가 역사 자료를 살펴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흥선대원군의 집권 초기 행보였습니다. 그는 안동 김 씨의 핵심 권력 기구였던 비변사를 과감하게 폐지했습니다. 비변사는 원래 군사 문제를 다루는 임시 기구였지만 세도정치 시기에는 모든 국정을 좌우하는 최고 권력 기관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폐지한다는 것은 곧 세도 가문의 숨통을 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당시 흥선대원군이 추진했던 정책들을 보면서 그가 단순히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물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양반들의 면세 특권을 축소했고,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했습니다. 호포제란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집에서 군역 대신 돈을 내게 한 제도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평등 정책이었습니다.

물론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당백전을 발행하여 물가 폭등을 초래한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6개월 만에 이를 중단하고 백성들의 원성을 달래려 노력했습니다. 만약 민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권력자였다면 당백전 유통을 강행했을 것입니다.

부자 간 권력투쟁과 개화정책 대립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면서 흥선대원군과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한 부자 간 갈등이 아니라 조선의 미래를 두고 벌인 노선 투쟁이었습니다. 고종은 건청궁을 지어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고, 운현궁과 궁궐을 잇는 전문마저 폐쇄해 버렸습니다.

1874년 민승호 폭탄 테러 사건은 이 권력투쟁이 얼마나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명확한 물증은 없었지만 폭탄 기술을 가진 흥선대원군 세력이 의심받았고, 이는 부자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갔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권력이 가족 관계마저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1881년 역모 사건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고종을 폐위시키려 했던 이 사건은, 아버지가 아들을 왕위에서 끌어내리려 했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흥선대원군이 직접 주도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의 부하들이 대거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친아들마저 제거할 수 있다는 무서운 집념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임오군란 당시 백성들과 군인들이 흥선대원군의 복귀를 요구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고종의 개화정책으로 인한 물가 폭등과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흥선대원군이 민생을 더 잘 챙겼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실제로 동학 농민군도 흥선대원군을 다시 집권시키려 했습니다. 이는 그가 백성들에게 일정 부분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쇄국정책과 개항, 그리고 일제 강점의 원인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무조건 비판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냉정하게 보면 개항이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의문입니다. 1866년 병인양요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습니다. 여기서 통상수교란 외국과 무역 관계를 맺고 외교 채널을 여는 것을 의미하는데, 당시로서는 불평등조약을 강요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저는 이 시기를 연구하면서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충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 아버지의 무덤을 도굴하려 한 사건은 조선인들에게 서양인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즉각적인 개항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결과론적 평가일 뿐입니다.

반면 고종은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별기군을 창설했습니다. 통리기무아문은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신설 기구였고, 별기군은 신식 군대를 의미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외세를 끌어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고종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청나라, 러시아, 일본을 번갈아 끌어들였고, 이는 결국 한반도를 열강의 각축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특히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것은 자국민을 외국 군대의 총칼로 제압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896년 아관파천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친 사건입니다. 조선의 왕이 자국 궁궐이 아닌 외국 공관에서 1년 넘게 머물렀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국가 주권의 상실이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에 군사 지원과 차관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일본과의 비밀 협정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지만, 이미 조선은 열강의 이권 다툼 속에서 자주성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완전히 일본에 병합되었습니다. 을사늑약이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한 조약으로,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독립국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저는 흥선대원군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도 분명 한계와 실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도정치로 무너진 나라를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려 노력한 점은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고종은 자신의 왕권 유지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고 자국민을 희생시킨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만약 흥선대원군이 좀 더 시대를 읽고 점진적인 개항을 추진했더라면, 그리고 고종이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까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은 없지만, 운현궁을 거닐며 저는 이 땅에서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결국 나라 전체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씁쓸한 교훈을 되새기게 됩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 두 사람 모두 조선 말기라는 최악의 타이밍에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인물들이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30eUJPOhH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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